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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절 여행기/국제연애 스토리

푸른지성과 카즈미의 국제 연애 스토리 - 첫만남

by 푸른지성 2013.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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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저에 대한 소개가 들어가야 이해가 빠를듯 합니다.

좀 길지만 작성해보겠습니다.


저와 카즈미의 첫만남은 작년 8월경으로 올라갑니다.

작년 9월초 저의 어머니께서 목디스크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하고 계셨죠.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기 바로 전에 만났어요.


과장하거나 미화할 필요없이 그대로 작성해봅니다. ^^

3년전 거의 1년간 입원하여 7회 전신마취 외과수술을 받고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있던 저는 겨우겨우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란게 정말 죽을듯이 아플때는 아무생각이 안납니다.

' 아 제발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 이렇게 아플 바에는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 ' 이런 생각만 나죠.


실제로 자살을 생각하며 병원 옥상에 올라간적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배꼽 옆에는 장을 꺼내어 장을 찢어 비닐팩을 붙여서 항문대신 사용하고 있었고

소변줄을 요도에 꽃아 소변이 보고 싶을 때 보는게 아니라 늘상 줄줄줄 나오도록,

전 다른 사람들과 달리 소변줄을 꽃아노니 그것도 너무너무 아팠습니다.


그런 생활을 7개월을 하고나니 옥상에 올라갈 때면

' 여기서 뛰어내리면 잠깐만 아프고 말꺼야 ' , ' 이렇게 살아서 뭐해... 더이상 좋아지지도 않을건데... '

이런 생각만 들었었죠....


몇년전부터 제 자유갤러리 사진들을 봐오던 분들은 아실겁니다.

전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크론병' 환자입니다.

신약으로 완치약들이 최근들어 개발이 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병원들이 인정하고 추천하는 완치약은 없는

그 크론병 말입니다.


크론병으로 외과수술을 7번 해본 분들이 계시다면 아시겠지만 살고 싶지 않습니다.

1년동안 입원하여 팔에 주사를 맞으니 팔에 있는 혈관들이 다 죽어서 다리에다 꽃아서 주사를 맞기도 합니다.

불과 2년전만 해도 제가 '살아난다기보다' '죽지는 않도록' 처치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어떠한 치료도 없고 그저 연명치료만 되고 있었던 어느날.

바로 2년전 제 생일 바로 전날 8월 4일.

전 퇴원을 결심합니다.


딱히 병원에서도 더이상 치료나 조치를 해줄것도 없고

저는 24시간 마약과 강력한 진통제에 의존하여 통증을 줄이고 병원에서 주는 밥 먹고 자고 하고 있었으니까요.


더이상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싶어서 전 제 생일이 되기 전에 밖으로 나와있는 장을 배로 다시 넣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배의 칼집이 채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피가 거즈에 스며드는 상황인데도 제 생일 바로 전날인 8월 4일날 퇴원을 하게 됩니다.

담당 전문의도 자리에 없는데 그냥 친해진 레지던트에게 강제수속을 밟아 달라 하여 퇴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 생일인 2011년 8월 5일,

저에게 생일 선물 겸 퇴원 선물을 하기 위해

한걸음 걸을 때마다 통증이 심한 상태에서도 백화점에 가서 40만원어치 화장품을 사서 선물하게 됩니다.

그 후로 몰라보게 하루하루 좋아졌습니다.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의지가 생겼었나봐요.


이렇게 죽을 바에야 어떻게든 저를 세상에 알리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전까진 저도 셀카나 사진찍는것을 귀찮아하고 셀카보다는 남을 찍어주고 별 의미없는 사진들을 찍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2011년 8월 4일 퇴원하고 나서부터 내 주변의 모든것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하루하루 좋아지는 제 모습을 남기기 위해 셀카를 찍기 시작했고

주변의 모든 것들을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잘 모르는 분들이 저에게 '왜이리 사진을 많이 찍느냐' , '셀카를 정말 좋아하나보다' 라고 생각하시는데에는 다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좋아지다가 어느덧 꽤 괜찮아졌습니다.

그리고 2011년 11월경 뽐뿌 자유갤러리에 저의 첫 셀카를 남기게 됩니다.

http://www.ppomppu.co.kr/zboard/view.php?id=free_picture&no=62271

생각보다 사진에 대한 반응이 좋네요.

이 사진 이전에는 그저 다른 분들처럼 뽐게나 보고 자유게시판이나 들락거리고 하던 보이지 않던 회원이였습니다.

이 사진을 기점으로 자유갤러리에 제 얼굴들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정도 외출도 혼자 할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쯤

아무일도 못하고 집에만 있는 상태이기도 하고 통증은 약으로 어느정도 조절이 가능한 상태이니

약간 지루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제방을 한번 직접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내방을 리모델링 하자 첫씨즌이였습니다.


이게 한번 올려보니 반응이 뜨겁네요.

이때부터 저의 시리즈 연재가 시작된것 같네요. ㅋㅋㅋ

제방을 거의 완벽하게 리모델링 하고나니 집 전체를 다 바꿔버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국엔 저와 어머니 둘이서 집 전체를 리모델링 해버렸죠..


이렇게 직접 몸을 움직이며 힘을 쓰다보니 이제 어느정도 정상인이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ㅋㅋㅋㅋ

저~ 위에 써있다시피 아플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지만 아픈것이 가시고 나면 잡생각이 막 나기 시작합니다.

어느정도 마약도 끊고 강력한 진통제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해졌습니다. 

(물론 지금도 비급여되는 말초신경 진통제와, 비마약성 강력진통제를 먹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외로워지기 시작하네요. 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얼굴살도 거의 없고 몸은 뼈밖에 없고 이런 나를 누가 봐줄까요?

깔짝깔짝 헬스를 시작해봅니다.

아직도 엉덩이 수술한 부분에서는 고름이 줄줄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요 ㅋㅋㅋㅋ

거즈를 대고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헬스장에 가서는 하지 못했지만 집에서 팔굽혀펴기 윗몸일으켜기 등등을 시작했습니다.

배에서 장을 꺼낸 자리의 통증 때문에 윗몸일으켜기는 정말 한...개도 하지 못했습니다.

살살살살 운동하다보니 한개 두개 되더니 운동으로 인한 통증도 거의 없어질 정도가 되었죠.


이제 저는 여자를 만나보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소개팅은 물건너 간 32살이니 제가 직접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트위터도 해보고 페이스타임도 해보고 각종 어플이며 랜덤채팅 등등 모든것을 다 해봤습니다.

그러면서 몇몇 여자도 만나보았지만 제 여자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흘러 작년 8월까지 시간을 낭비하며 지냈습니다.

물론 그동안 몸은 더 좋아졌지요. 

거의 정상생활이 가능할 정도까지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인생이였습니다.

완치가 언제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니... 결혼은 어떻게 할까요.


누가 이런 나를 좋아해줄까요?


어머니가 목디스크 수술을 하기 1주일 전

저는 저 나름대로. 우리나라에선 나의 상처와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나를 안고 사랑해줄 여자가 없다. 고 판단하고

SNS를 타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SNS를 타고 타고 타고 일본으로 날아갔습니다.


여러 아가씨가 있네요.

예쁘고 정말 일본 야동에나 나올법한 몸매와 외모를 가진 아가씨도 있고,

정말 너무 인형같지만 어린 아가씨도 있고,

자유분방한 아가씨도 있고, 일본에도 다양한 아가씨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이 통해야 말이죠....

전 일본어를 전혀 몰랐습니다.

남자라면 다 아는 "이끄, 야메떼, 스고이, 혼또니" 이런거밖에 모르는 남자였으니까요.


그러던중. 드디어 카즈미를 만났습니다.


SNS에 올라온 사진들이나 글을 보면 작고 귀엽고 아기자기한 것을 참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귀여운 소녀같은 느낌이면서도 어떤 포스트에는 살짝 개방적이며 적극적인 모습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일본 아가씨들과는 유달리 한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대단하였습니다.

우리는 뭔가 서로 자석인것 마냥 순식간에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SNS를 통해 몇일간 대화를 하다가 제가 카톡으로 넘어가자고 하였고 카즈미는 흔쾌히 받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카톡의 무료음성 통화서비스인 보이스톡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보이스톡이라는 것을 해보지 않은 저로서는 보이스톡으로 통화를 한다는 그 자체로도 신기했지만

한국이 아닌 일본이기에 보이스톡으로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도 신기했습니다.


우리는 그날 보이스톡을 틀어놓고 같이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서로에게 무엇이 그렇게 끌리는 것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저 그 순간의 느낌이 서로에게 제대로 통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 통화하면서 서로가 느꼈던 감정은 처음 통화하는 사람같지 않은 아주 편안한 느낌이었다는 것이였지요.

"왜 이제야 나타났니" 라고 제가 했던 말이 기억이 납니다.

안타깝게도 같은 한국에 있는... 같은 땅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보고싶어도 쉽게 볼 수 없다는 정말 큰 장벽이 있었습니다.

마음 한켠으로는 '이제야 내 짝이 나타난 것 같다....' 라는 감정과

'이렇게도 먼곳에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 인연과 함께할 수 있을까...' 라는 감정이 교차하여 더욱 더 애틋해던 것 같습니다.

그날 밤 통화의 마지막쯤에 우리는 "당신(카즈,오빠)이란 사람과 같이 살면 행복할것 같다" 라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하기 시작한 몇일 뒤 저의 어머니께서 목디스크로 수술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먹고자며 어머니 병간호를 하기 시작했죠.

주변 사람들이 환자가 환자를 간호한다는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어엿한 정상인이 된 사람이지만 주변 친척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아직도 저는 환자였으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만난 뒤의 하루하루를 기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던 SNS를 싹 지우고

우리 둘만의 SNS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며 낮에는 카톡으로 대화하고 밤이되면 병원 1층으로 내려와서 페이스타임이나 보이스톡으로

얼굴을 보며 대화를 하거나 음성통화를 하며 우리가 처음 만날 날만을 기다리며 지냈습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서로가 만날 날을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디스크도 서서히 호전되고 어느덧 퇴원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디테일한 우리의 첫 만남 이라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외국여행은 단 한번도 없었고 여권이라는 것도 다른사람들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저는

우선 여권이라든지 외국여행이라는 것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카즈미가 먼저 한국으로 와서 저와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이유인 즉슨, '자기는 한국에 여러번 와봐서 어렵지 않은데

오빠는 한번도 외국에 나가본적도 없고 우리가 처음 만났는데 오빠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였습니다.

나는 말도 안된다는 얘기라고 하며 다그쳤지만 결국 카즈미가 하자는 대로 카즈가 오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이미 우리는 "같이 살자" 라는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정했습니다.

만난지 한달도 안된... 아니 실제로는 만나지도 않았던 사이지만 이미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9월이 거의 지나갈 무렵까지 카즈미가 일이 안되고, 집안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먼저 오지 못하게 되어

결국 제가 먼저 가기로 합니다.


여기서부터 푸른지성의 일본여행, 카즈미의 한국 여행 시리즈가 시작이 됩니다.


푸른지성과 카즈미의 여행 전편

여행기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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